장미의 이름(The Name of the Rose), 이름과 AI

우연히 들은 라디오 프로그램이 재밌어서 글로 남겨본다.

 

11월 20일 방송된 KBS의 <작은 서점>이라는 라디오 채널을 우연히 듣게 되었다.

이 날 방송에는 뇌과학자이자 AI 연구자로 잘 알려져 있는 김대식 교수님이 출연하셨다.

 

김대식 교수님의 인생책이 소개되었는데,

그 중 하나는 움베르코 에코의 「장미의 이름(The Name of the Rose)」 이었다.

 

이 책은 단순 추리소설이 아니고,

인간이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이해하는지에 대한 깊은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라고 한다.

 

유명론(nominalism)과 AI의 ‘보편성’ 이야기

특히 들으면서 재미있었던 부분은,

책에 담겨있는 유명론(nominalism)을 AI와 '보편성(universals)' 문제에 대해 연결지어 설명한 부분이다.

 

"우리가 고양이를 고양이라고 인식하는 것은 '이름'이 있기 때문이다."

 

이 문장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고, 이 말의 배경에 기호학과 인공지능 연구의 역사가 모두 얽혀있다.

 

우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이미 머릿속에 구축된 언어적 범주(label, category)를 통해 세상을 해석한다.

즉, 이름(name)이라는 기호가 있어야 세상이 구조화된다.

 

생각해보면 참 이상하면서도 놀랍다.

세상에는 수많은 종의 고양이가 있고, 크기도 무늬도 생김새도 제각각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다양한 존재들을 자연스럽게 하나의 '고양이'로 묶어낸다.

 

AI, 기호 기반에서 기계학습으로

김대식 교수님은, 이런 인식 구조가 AI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고 설명했다.

초기의 AI는 규칙 기반 접근을 시도했는데, 

예를들어, 귀 모양이 삼각형이고 네 발이 있고, 털이 있으면 고양이다.

이런식의 essential feature을 정해 사물을 정의하려 했는데,

이런 방식은 현실의 복잡성을 전혀 설명하지 못해 철저히 실패했다.

 

결국 AI도 인간처럼

'이름(label)'을 통해 범주를 학습하는 방식으로 전환되었고, 이것이 오늘날 Supervised Learning의 기본 틀이 되었다.

 

떠오른 의문: 그럼 라벨이 없는 unsupervised learning은 어떻게 학습하지?

자연스러운 의문이 떠올랐는데.

그럼 supervised learning이야 그렇다고 치고 unsupervised learning에서는 어떻게 이름(label) 없이 학습하지?

 

생각해보면 인간도 이름(label)을 붙이기 전에 이미 구조를 학습한다.

누군가 고양이라고 이름을 알려주기 전까지는 그런 형태의 존재를 시각적으로 감지한다.

즉, 이름이 없어도 패턴과 구조를 파악한다.

 

Unsupervised learning의 세계에서는 이름이 없어도 구조를 학습한다.

비슷한 것끼리 묶고, 자주 함께 등장하는 패턴을 찾고, 데이터 내부의 구조를 스스로 정렬한다.

즉, 의미(label)를 붙이기 전에 구조(structure)를 학습하는 단계를 이용한 것이다.

구조가 먼저 오고,이름은 그 구조에 의미를 부여한다.

 

“장미라는 실체는 사라지고, 이제 이름만 남는다.”

다시 장미의 이름이라는 책으로 돌아와서,

중세에서 장미는 단순한 꽃이 아니라 아름다움, 순수함, 신성, 혹은 비밀을 상징했다.

 

소설 마지막에는 이런 문장이 등장한다.

'장미'라는 실체는 사라지고 이제 이름만 남는다.

 

즉,

실체는 변하고 사라지지만, 이름과 기호는 남아 의미를 만들어내고 세계를 구성한다.

 

장미 그 자체 보다는

우리가 '장미'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 연상하는 개념, 상징, 이미지는 실체보다 훨씬 오래 지속된다.

 

이름이 세계를 만든다

이 모든 이야기는 결국 하나의 결론으로 모인다.

 

인간은 이름을 통해 세상을 분류하고

AI는 라벨로 데이터를 학습하며

프로그래밍은 이름을 단서로 코드를 조직한다.

 

결국 구조는 형태를 보이게 하고, 이름은 그 형태를 존재하게 한다.

이름이 붙는 순간, 그것은 기억되고 분류되고 지속될 수 있는 무언가가 된다.

 

이 모든 흐름이 하나의 원리로 연결된다는 사실이
왠지 모르게 마음에 남았다.